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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완료/창간호

[1호]오백원

 왼손에 전화기. 오른손에는 종이 조각. 한참동안 바라본다. 굳어버린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가방이 무겁다. 갈 곳이 없다. 습관처럼 가던 도서관. 하지만 다리가 도서관을 향해 습관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담배를 입에 물고 걷는다. 지도도 없다. 그냥 걷는다. 햇볕이 눈 속을 파고든다. 전화기를 들어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번호를 누르다 그만두었다. 허파 속 연기가 입술 사이로 삐져나온다. 유효기간이 지난 종이. 주먹을 쥐어 구겨버렸다. 눈 속에 파고든 햇볕이 흘러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햇볕을 잡아 빼내고 싶지만 잡히지 않는다.

 “너무 길었어.”

 다리가 계속 걷는다. 어디로든 흘러가고 싶다. 결국 모든 것은 정해져 있다. 정해진 답을 선택하고 방에 돌아올 거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생각을 하고 싶다. 정해진 답을 부정하고 싶다. 웃음. 내가 언제 웃었지? 억지로 미소를 지어보려 해도 미소가 지어지지 않는다. 언제부터 내 입술 끝에 쇳덩이가 매달렸던 것일까.

 그날 밤. 기억나는 것이 거의 없다. 집에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창수는 내가 혼자 집에 잘 걸어 들어갔다고 말했다. 그런데 대체 어디에서 무엇이 잘못 되었기에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일까. 분명히 나는 집에 잘 들어갔다. 그날 술값은 창수가 전부 내었다고 했다. 집에 들어오는 동안 지갑을 주머니에서 꺼낸 적이 아예 없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지갑에 돈이 하나도 없었다. 왜 지갑에서 돈만 사라진 것일까? 지갑이 통째로 사라졌다면 어떻게든 이해를 할 수 있다. 집에 오는 길에 지갑을 떨어트렸거나 누가 몰래 훔쳐갔다고 생각하면 어려울 것이 없다. 그러나 지갑은 멀쩡히 있는데 지갑 속의 돈만 없어졌다. 정확히 돈만 사라지고 나머지는 전부 그대로 있다. 그렇다고 방에 도둑이 들어온 것도 아니다. 창수도 내 돈을 건들지 않았다. 돈이 없어질 곳이 없었다. 그런데 돈이 없었다.

 화분이 보인다. 호박을 심어놓았다. 호박은 담을 타고 올라가 창살을 움켜쥐고 있다. 거기까지다.  유리로 된 창문에는 틈이 없다.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소리도 드나들고 빛도 드나든다. 하지만 호박 줄기는 들어갈 수 없다. 창살을 타고 올라가다 유리창을 두드린다. 그러나 유리창 너머로 갈 수 없다. 유리창은 열리지 않는다. 호박은 창살을 움켜쥐고 절규한다. 다 드나드는데 왜 나는 못 들어가냐고. 유리창 너머는 따스하다. 아무 것도 없는 밖이 아니다. 거기에는 따스함이 있고 안정이 있고 화목이 있다. 호박 줄기는 선택받지 못했다. 그 너머에는 선택받은 자들만 있을 뿐이다.

 차가 지나간다. 시간도 지나간다. 하루가 중요하다 하는데 정말 중요한 하루인지 알 수 없다. 돈만 잊어버리지 않았다면 없어도 되는 하루였을 거다. 평소처럼 도서관에 가서 책을 펼치고 공부를 한다고 앉아 있었을 테고, 아무 생각 없이 글자들의 나열을 보며 또 똑같은 끝이 보이지 않는 일을 걱정했겠지. 하루를 공부하지 않는다고 바뀔 내 현실이었다면 이미 몇 번은 더 많이 바뀌었을 테니까.

 돈을 잃어버리고 집에 전화했다. 마땅히 방법이 없었다. 한참 머리를 굴려도 답이 없어서 집에 전화를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마음에 달릴 무거운 쇳덩이 뿐이었다. 집이 어렵구나. 너도 어서 취직해야지. 동네 누구는 벌써 취직했다더라. 이제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여기 저기 아프구나. 차마 술 먹고 돈을 잃어버려서 돈을 다시 보내달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날도 지금처럼 막연히 걷고 있었다. 집에 차마 돈을 또 보내 달라 하지 못하고 마땅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 그냥 걸었다. 저 가게. 그때도 보였다. 복권. 그 중에서도 로또. 내가 선택한 수 6개로 대박을 기다릴 수 있는 복권. 큰돈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많은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잃어버린 지갑 속에 들어있던 돈 만큼만 원했다. 안 될 것도 없었다. 당첨이 기적이라지만 이 정도면 소박한 기적이니까.

 길가에 사람들이 있다. 웃는 얼굴이 없다. 무표정한 얼굴이거나 찌푸린 얼굴뿐이다. 사람들이 나를 앞질러가고 나를 피해 달려간다. 무거운 마음만큼 무거운 발을 끌고 가는 나는 그들에게 단지 길을 방해하는 가로수에 불과하겠지. 모두가 바쁘다. 다 살기 위해 바쁜 것일 것이다. 무표정과 찌푸린 얼굴. 웃는 얼굴은 없다. 사는 것이 즐거워야 살만한 것 아닌가? 사는 것이 괴로운데 굳이 살겠다고 매달리는 것은 고통 받는 것을 즐기는 것일까? 아니면 아직까지 그 누구도 모르는 사후세계가 무서워 억지로 버티고 있는 것일까? 나도 지금 왜 내가 이렇게 고민하는지 모르겠다. 사는 것이 정말 괴롭고 힘들다. 그런데 살아야겠다. 괴로워도 참아야한다는 것은 본능의 외침인 것일까, 경험과 학습으로 인해 습관적으로 나오는 것일까. 포기하면 편하다. 집에서 나와 거리에서 누워 자면 되고 일을 찾지 않고 구걸하면 된다. 그런 삶을 선택한 대신 영원히 그런 삶을 살아야할 것이다. 사람들에게 무시 받고 동정의 눈길을 받으며 영원히 살다 죽을 것이다. 하지만 구차하게 목매야 하는 것은 어차피 그 생활을 선택해도 마찬가지 아닌가? 단지 조금 더 편하고 싶은 마음에 항상 불안한 마음을 가슴에 담고 사는 것 뿐 아닐까.

 큰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욱 기대하게 된 것일까. 로또를 구입한 날부터 이상하게 무언가 될 것 같았다. 술을 먹고 지갑을 잃어버린 것이 운이 좋아짐을 알려주는 신호탄처럼 여겨졌다. 그냥 기분이 좋았다. 단지 복권을 하나 산 것 뿐이었다. 그런데 다른 날들과 달랐다. 무언가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초조함과 쫓기는 마음이 없는 기다림이었다. 언제부터 그 기다리는 마음이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처음 샀을 때는 크게 그런 것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런 마음이 조금씩 내 마음을 덮어가기 시작했다.

 “예수 믿으세요!”

 거리에서 기독교를 전도하는 사람이 외친다.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한다. 지금부터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을까? 죽은 후 천당에 가는 것 말고 지금 내 상황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예수를 믿으면 당장 잃어버린 돈이 다시 생길까. 만약 그렇다면 지금부터 광신도라도 될 수 있다. 현실에서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무엇을 못 믿을까. 집어넣은 이력서가 몇 통인지 모르겠다. 계속 집어넣는데 계속 떨어진다.

 “요즘 애들은 배가 불렀어.”

 돈이 없으면 아무 곳이나 들어가서 일하라는 말. 너무 많이 보았다. 하지만 남의 일이라고 너무 쉽게 말한다. 아무리 아직까지 제대로 직장을 다닌 적이 없다고 해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그 결과를 보여주었다. 같은 일을 하는데 비정규직이라고 차별을 받는 것까지는 참을 수 있다. 하지만 2년만 일하고 회사에서 나와야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그 2년 후. 어디에 다시 들어갈 것인가? 이력서 넣을 곳을 찾기 위해 구인구직 사이트에 들어갈 때마다 괜찮은 곳은 대부분 경력직을 찾고 있다. 비정규직 2년 하면 그 경력을 인정받아 더 좋은 회사에 쉽게 들어갈 수 있다? 그러면 비정규직 문제가 문제로 되지도 않았을 거다. 딱 2년만 고생하고 그 다음에 그 2년에 대한 보상을 받으면 되니까.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많은 좋은 회사 정규직들도 자의든 타의든 옷을 벗고 있는 판에 비정규직 2년 경력을 참 인정 잘 해 주겠다. 물론 예외도 있다. 종종 뉴스에 보도되는 사람들. 하지만 그들이 정말 특별하기 때문에 뉴스에 나오는 것이다. 그들이 특별하지 않고 평범한 경우였다면 왜 굳이 다른 사건 사고도 많은데 기사로 만들까? 특별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억지로 기사를 써야만 할 정도로 우리 사회가 정말 안전하고 평화롭고 불평 없는 사회라는 주장은 말이 되지 않는다. 당장 거리에 누워있는 노숙자들이 거짓이라고 온몸을 다해 반박하고 있다. 노숙자들은 정말 자기가 원해서 노숙자 생활을 시작했다? 바보도 그 정도는 거짓이라는 것을 안다.

 “민희 대기업 다니는 사람이랑 사귄대. 남자 집이 꽤 산다던데?”

 수요일 밤이었다. 술 때문에 돈을 잃어버렸지만 또 친구들과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민희와 친한 경숙이와 친하게 지내는 수철이가 나를 안 되었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며 이제 헤어진 내 여자 친구의 소식을 알려주었다.

 “그럴 줄 알았어. 너랑 그렇게 사이가 좋았는데 갑자기 헤어지자고 하다니 뭔가 있을 줄 알았다니까.”

 “그만하자.”

 민희로부터 헤어지자는 말을 듣기 전부터 민희와는 헤어질 것 같았다. 내가 군대를 마치고 복학했을 때 민희는 이미 좋은 기업에 취직해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학생과 직장인. 그것도 남자는 학생, 여자는 직장인. 아무리 우리 사회가 평등해지고 있다고 하지만 전통은 쉽게 무시하고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복학 후부터 우리는 하나도 맞지 않았다. 예전처럼 서로 자주 만날 수 없는 것은 당연했고, 만나도 너무나 다른 두 세계에서 온 사람들 같았다. 민희는 내 이야기를 너무 시시해 했다. 이미 다 겪은 일을 나는 그제야 겪고 있는 것이었으니 많이 시시했을 것이다. 나는 민희의 이야기가 와 닿지 않았다. 직장 상사에 대한 불평불만까지는 그래도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었지만 재테크나 신용카드 이야기처럼 민희의 소소한 일상 이야기로 가면 그냥 고개만 끄덕거릴 뿐이었다. 예전에는 학생식당에서 밥을 함께 먹으며 시간을 잘 보냈는데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만날 때마다 둘 다 무엇을 하고 무엇을 먹을지 내색하지 않아도 신경을 많이 쓰게 되었다. 예전에는 만나는 것이 즐거웠는데 그때부터는 만나기로 한 날이 다가오면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 우리 그만 만나자.”

 민희의 문자 메시지를 받고 그다지 놀라지 않았던 것은 이미 그 결과를 오래전부터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문자 메시지로 헤어지자고 하면 상당히 무례한 행동이라는 말도 있던데 그다지 무례하다고 생각되지도 않았다. 기분은 매우 나빴지만 민희가 그동안 참 많이 참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백수가 되고서도 한동안 연인으로 지내준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날. 술자리에서 일찍 일어났다. 수철이가 내 팔을 잡고 한 잔 더 하러 가자고 졸랐다. 그러나 그냥 뿌리쳤다.

 “수철아 걔 놔줘. 걔 민희 때문에 술 먹다 돈도 잃어버렸잖아.”

 친구들은 한 잔 더 마시러 가고 나는 그들과 반대쪽으로 걸었다. 바람이 시원했다. 그날도 그냥 걸었다. 아무 생각 없이 한참 걸어서 마주친 것은 바로 민희가 사는 자취방이었다. 자취방 불은 꺼져 있었다. 민희를 부를 생각 따위는 없었다. 어차피 지금 불러내 무릎 꿇고 제발 우리 헤어지지 말자고 빌어도 바뀔 것은 없었다. 그렇게 한다고 내 주머니에 돈이 두둑이 채워지는 것은 아니니까. 백수와 직장인이어서 헤어졌다는 말은 핑계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 나와 민희 사이에 문제가 발생하게 된 원인은 바로 돈이었고, 결국 돈 때문에 헤어진 것이었다. 민희를 잡고 싶으면 돈이 필요했다. 하지만 방값조차 잃어버려 돈이 없었다. 지갑에서 로또 종이를 꺼냈다. 이것이 만약 1등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 물론 너는 돌아오지 않겠지. 하지만 후회는 하게 될 거야. 너에 대한 복수는 아니다. 그냥 헤어진 남자친구가 잘 되었다는 기억 정도는 하게 해주고 싶을 뿐이었다.

 계속 걸었더니 목이 마르다.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딱 500원짜리 동전 하나가 잡혔다. 참 애매한 액수네. 100원짜리 동전 하나가 있는 것보다야 낫다. 하지만 100원짜리 동전 하나가 있었다면 그냥 포기하고 지폐를 쓸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500원이다. 조금 싸게 파는 가게에서는 500원으로 살 것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가게에서는 500원으로 살 것이 없다.

 “이 캔커피 얼마에요?”

 “600원.”

 딱 100원이 부족하다. 주머니를 뒤져보아도 동전이 더 잡히지 않는다. 망할 500원. 정말 애매한 500원인데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지갑을 열어 1000원을 꺼냈다.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500원을 바라보았다.

 “넌 대체 뭐냐?”

 500원을 향한 질문. 그러나 500원은 답이 없다. 500원은 왜 이리 어정쩡한 거야? 확실히 부족하든지 확실히 딱 맞아떨어지든지 할 것이지 정말 애매하게 부족하거나 남는다. 딱 맞아떨어지는 경우는 이상하게 별로 없다. 100원보다 낫기는 하지만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100원이면 오락실에 가서 오락이라도 한 판 할 수 있다. 하지만 500원은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100원보다 다섯 배나 가치가 큰 동전인데 정작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100원이나 마찬가지다. 결국 다른 동전과 힘을 합쳐야만 제몫을 할 수 있기는 한데 100원은 어차피 100원끼리 뭉쳐도 자기 몫을 잘 한다. 그러나 500원은 500원끼리 뭉치기도 어려울뿐더러 뭉쳐보아야 결국 지폐 1000원과 같다. 500원짜리 두 개보다는 지폐 한 장이 훨씬 쓰기도 좋고 가지고 다니기도 좋다.

 “넌 왜 있는 거냐?”

 500원짜리 하나가 100원짜리 다섯 개 보다는 낫다. 하지만 100원은 잘 생긴다. 지폐로 계산하면 100원짜리 몇 개쯤은 금방 모을 수 있다. 500원을 낼 때 500원짜리 동전 하나를 내는 것보다 1000원짜리 한 장 내거나 100원짜리 5개를 낸 적이 훨씬 많은 거 같다. 500원을 내야 할 때 100원짜리 5개와 500원짜리 1개가 있으면 보통 100원짜리 5개를 낸다. 그래도 100원보다 낫다고 우대를 받는 거 같기는 한데 정작 500원만 가지고 쓸 일이 별로 없다. 그렇다고 500원을 100원짜리로 쓸 수도 없는 노릇이다. 500원을 100원으로 쓰면 나만 400원 손해니까.

 “너도 참 나 같은 놈이구나.”

 500원을 꼭 쥐었다. 다 크지도 못하고 적은 채로 나름의 구실도 못하는 이상한 녀석.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얼마 되지 않는 한심한 녀석. 기껏 잘 키워놓았는데 할 수 있는 게 별 거 없는 답 없는 녀석. 하지만 100원보다 못하다고 할 수도 없는 그런 녀석.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결국 너는 나중에 100원짜리의 도움을 받아서 쓰게 되겠지.

 또 일어나 걷는다. 생각 없이 걷는데 항상 자주 걷던 길을 그대로 걷고 있다. 토요일 아침. 지금처럼 너무나 맑았다. 햇볕에 잠을 깨었는데 햇볕 속에서 숫자 1을 보았다.

 “진짜 1등이 되려고 그러나?”

 헛것을 보았다고 생각했지만 너무나 강렬한 기억이었다. 눈부신 햇살 속에서 보았던 1. 만약 정말 1등이 되면 어떻게 하지? 일단 외국으로 도망갈까? 복권 1등 당첨되면 똥파리들이 어마어마하게 달려든다는 말을 들었다. 1등이 되면 출국준비를 다 하고 복권을 가지고 은행에 간다. 돈을 받자마자 공항으로 달려가 외국으로 나간다. 그 정도 돈이라면 외국에서 좀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구질구질한 모습과는 안녕이다. 요즘은 당첨 금액이 예전처럼 크지는 않다. 그래도 내가 죽을 때까지 일해 모을 수 있는 돈이 아니다. 그 돈으로 내 자신을 발전시키고 정말 뛰어난 인재가 되어서 많은 돈을 벌며 행복한 인생을 즐길 거다. 굳이 한국에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 그 정도 돈이 있다면 외국에서 작정하고 노력해 성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첨 금액은 굴리면서 적당히 일하며 살아도 된다. 선택의 폭이 아주 넓어진다. 그동안 한 번도 생각해볼 수 없었던 다양한 선택들이 가능해진다. 요즘은 당첨 금액이 적어서 1등 해도 서울에서 괜찮은 집을 살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그 정도 돈이 있다면 지금처럼 취직에 얽매여 살지 않아도 된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 어느 정도 일을 하며 돈을 벌기는 해야겠지. 너무 높은 능력을 요구하는 일은 능력이 되지 않으니 돈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도 이 거지같은 하루하루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것이다. 취직은 되지 않고 돈은 없다. 시간은 흘러가고 나이는 자꾸 먹어간다. 기업에서 지원 자격으로 걸어놓는 나이 상한선이 자꾸 눈에 들어온다. 자꾸 쫓기는데 되는 것은 없다. 잘하고 있는 것인지 잘못하고 있는 것인지 생각할 여유조차 없다. 하지만 로또 1등 당첨금만 있다면 많이 바뀔 것이다.

 그때의 두근거림. 그 이상한 일 덕분에 정말 엄청난 설렘을 경험했다. 대학교에 합격했을 때에도 그런 기분과 환상은 들지 않았다. 아무리 방송에서 대학생들이 노는 모습으로만 나오고 지긋지긋했던 고3 수험생이 끝났다는 해방감을 만끽할 때조차 그렇게 두근거리지는 않았다. 민희에게 고백해 사귀게 되었을 때에도 그러지는 않았다.

 계속 걷는다. 사람들도 걷고 나도 걷는다. 전단지를 나누어주는 사람이 내게 다가와 내 손에 전단지를 쥐어준다. 영어 학원 전단지다. 자기네 학원에 오면 영어를 잘 할 수 있다고 광고하고 있다. 전단지에는 영어보다 토익이 더 강조되어 있다. 내가 계속 떨어지는 것은 토익 점수가 낮아서 그런 것일까? 어차피 학점은 학교를 졸업했으니 수정할 수 없고 그렇다면 결국 토익에서 점수를 높여야 조금이라도 취직 가능성이 높아지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전단지를 유심히 바라보는데 전단지에 영어보다 토익이 훨씬 더 강조되어 있는 것이 재미있다. 거리를 다니며 자주 받는 전단지 중 하나가 학원 전단지인데 왜 지금까지 이것을 느끼지 못했을까? 영어보다 토익을 강조한 학원 전단지는 정말 흔한 전단지인데 말이다. 어차피 토익이라는 것은 영어 시험의 일종이다. 상식적이라면 전단지에서 토익보다 영어가 강조되어야 하겠지만 영어보다 토익이 강조되고 있고 이것은 당연한 것이 되었다. 영어를 못해도 토익 점수만 좋으면 되는 거니까. 기업들이 모두 영어 점수를 최소 자격조건으로 내거는 것도 참 우스운 일이다. 그렇게 사원들을 뽑아 과연 얼마나 많은 사원들이 영어를 사용할까? 그리고 이렇게 영어 교육을 강조하는데 왜 기사에서는 항상 우리나라 사람들 영어 실력이 형편없다는 내용뿐일까?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열심히 영어를 공부하고 취직하기 위해 또 영어를 공부하고 대학교에서조차 강제로 영어를 시키는데 말이다. 구직자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된 것은 오래 전 일이다. 내가 기업을 골라갈 수 있는 입장은 전혀 아니기 때문에 나 역시 취직하기 위해 토익 점수를 만들었다. 그때는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할 틈도 없었다. 토익 점수를 만들기 위해 공부하면서 그냥 모든 기업에서 토익 점수를 요구하기 때문에 반드시 준비해야 하는 한 과목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 이상 그 어떤 생각도 하지 않았다. 모두가 그것에 대해 당연하게 생각했고, 생각하고 있다. 거기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비상식적인 사람이고 전단지에 영어보다 토익이 강조된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다.

 “어떻게 되었어?”

 “다 떨어졌어.”

 “졸업 미루는 것은 어때? 졸업하면 취직할 때 불리하대.”

 대학교 4학년 말. 입사 지원했던 곳 모두 떨어져 버렸다. 서류 전형에서 전부 떨어져 버렸기 때문에 남들보다 결과를 빨리 알 수 있었다. 민희는 내게 졸업을 조금 미루라고 했다. 교수님께 취직이 안 되었다고 말씀드려 낙제점을 달라고 하면 그 정도는 요즘 워낙 취직이 안 되기 때문에 다 해주신다고 알려주었다.

 “그러면 등록금 나가잖아.”

 “어차피 신청학점만큼만 내는 거야. 너 졸업해버리면 졸업예정자만 지원할 수 있는 곳은 지원도 못해.”

 “그래도 돈이 너무 아까워.”

 그때 민희는 별 말 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분이 상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아직 내가 세상 물정을 잘 모른다는 눈빛이었다. 그렇게 내게 대놓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사실 민희가 그렇게 알려주지 않아도 나도 그 방법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돈이 너무 아까웠다. 그냥 버리는 돈이라는 것 자체도 아까웠지만 그 돈을 학교에 내야한다는 것이 더 아까워서 싫었다. 매년 등록금은 꾸준히 인상되었다. 하지만 좋아지는 것은 없었다. 장학금은 군대에 입대하기 전보다 줄어든 느낌이었다. 등록금은 많이 인상되었는데 장학금 액수는 거의 변함이 없는 것 같았다. 학교에서 장학금 총액은 조금만 늘리고 장학금 수혜자 비율을 높이기 위해 더 많은 사람을 주도록 제도를 바꾸었다는 말이 있었다. 불필요한 외관만 꾸미고 내부 시설은 변한 게 없었다. 취직 준비로 정신없는 고학년들에게 수업의 질은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최소한 강의실에 앉아있는 동안 불편한 의자와 좁고 흔들리는 책상만큼은 따질 정신이 있었다. 그래서 학교에 돈을 내고 학생 신분을 유지하는 것이 더욱 싫었다. 부모님께 휴학도 아니고 졸업연기를 하는 이유를 이해시켜드릴 자신도 없었다.

 모두 지나간 일일 뿐이다. 어차피 되돌릴 수 없다. 되돌린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을 것이다. 요즘 아이들처럼 대학교 들어가자마자 바로 취직 준비? 대학교 들어가자마자 아무 생각 없이 쫓기는 분위기에 휩쓸려 취직 준비를 한다고 달라질 리는 없다. 우리는 대학교 들어가자마자 취직 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수가 되었다는 것은 근거가 없다. 우리가 대학교 들어갔을 때 입학하자마자 취직 준비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군대 가기 전에 실컷 놀다가 군대 전역 후부터 재수강하고 취직 준비해서 취직한 사람도 많다. 이것은 신화가 아니라 사실이다. 오히려 입학하자마자 취직 준비하는 것은 기사거리가 되는데 군대 전역 후에 재수강하고 취직 준비하는 것은 기사거리가 되지 못한다.

 땅에서 개미가 죽은 개미를 물고 기어간다. 저것은 자기가 먹기 위한 것일까? 자기가 먹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개미가 개미를 먹는 것을 보고 잔인하다고 욕할 수 있을까? 다른 식량이 많은데 굳이 동족을 잡아먹는다면 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먹을 게 없어서 저러는 거라면 욕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남을 밟지 않으면 살 수 없어서 남을 밟은 것일 수도 있다. 죽더라도 지켜야할 고귀한 가치?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매일 괴로워도 죽지 않으려고 발악한다. 죽는 것은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무서운 것이다. 이제 이 세상과 통할 수 없다는 것 외에 우리가 아는 것은 없다. 그러나 무서운 거다. 죽은 후에 지금보다 더 행복할지 불행할지 그 누구도 모른다. 자기가 직접 죽어보지 않는 이상 죽은 자와 대화할 수 없으니 알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모두 무서워한다. 저 개미도 먹을 것이 없어서 동족의 시체를 물고 가는 것일 거다. 동족의 시체보다 맛있고 영양가 많은 먹이가 풍부했다면 저 개미에게 동족의 시체를 먹으라고 해도 먹지 않았을 거다.

 토요일 밤. 로또 번호를 확인했다. 확인하고 싶어서 확인했다. 그러나 확인하지 않았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조금 더 즐거운 꿈을 꿀 수 있었겠지. 하지만 현실은 내 눈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단지 눈을 감고 꿈을 꾸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로또라는 꿈을 꿀 수 있는 종잇조각을 쥐고 두 눈을 감고 있었던 것이다. 현실은 계속 내 눈 앞에서 가만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젠가는 내가 꿈에서 깰 것을 현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눈을 뜨도록 나를 보챌 필요가 없었다. 그저 가만히 내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눈을 뜨면 다시 내 멱살을 잡고 나를 질질 끌고 갈 것이다. 계속 그렇게 나를 끌고 왔고 잠시 내가 꿈을 꾸는 동안 내가 쉴 수 있게 배려를 해 준 것뿐이었다. 잠시 나를 쉬게 해서 더욱 괴롭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지, 나를 이제 놔주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휴지 한 조각만도 못한 로또 종이를 쥐고 멍하니 앉아있었다. 번호를 확인하고 나서 오늘 아침까지 그렇게 계속 있었다. 현실은 내 앞에서 비웃음을 날리고 있었다. 변한 것은 없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돈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나 지금이나 이번 달 월세를 마련할 방법이 없는 것도 변하지 않았다.

 “또 떨어질 줄 알았어.”

 6개 숫자 모두 틀린 로또를 보니 로또를 다시 구입할 마음은 아예 없었다. 꿈은 한 번으로 충분했다. 꿈을 꿀 때에는 즐거웠지만 꿈에서 깨어나자 현실이 더욱 힘들게 느껴졌다. 현실을 잊기 위해 다시 로또를 산다고 현실이 바뀔 것 같지는 않았다. 애초에 기적을 믿는 것이 아니었다. 기적으로 바뀔 수 있는 현실이었다면 지금까지의 노력으로도 충분히 바뀌었을 것이다.

 결국 내 앞에 나타난 것은 민희의 자취방이었다. 어디에 갈지 생각하지 않고 걸었는데 민희의 자취방 앞으로 다시 와버리고 말았다. 일주일동안 꿈을 꾸었다. 바로 지금 여기에 웃으며 서 있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지금 나는 웃고 있다. 웃고 있는 것은 그 꿈속의 나와 같지만 꿈속의 나는 기뻐서 웃고 있었다. 현실의 나는 허탈해 웃고 있다. 말도 안 되는 한낱 꿈에 빠져 즐거웠다는 것이 한심해서 웃고 있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내 모습에 어이없어 웃고 있다. 복권이 당첨되어 민희에게 다시 사귀자고 말하려는 꿈을 꾸지 않은 것은 아니다.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꿈의 한 부분이었다.

 바지 주머니에서 구겨진 로또 종이를 꺼내 주먹을 쥐어 구겼다. 이게 일주일동안 나를 참 즐겁게 했단 말이야. 덕분에 지금은 기분이 더욱 안 좋다. 현실이 더 많이 괴롭다. 매일 똑같이 당하는 고통이라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그러나 꿈을 꾸고 나니 이 고통이 왠지 새롭다. 꿈이 현실이 되었다면 당당히 네 앞에 섰을 거야. 그것이 실력이 아니라 요행이라 해도 어차피 결과가 중요한 거니까. 

 “잘 가라.”

 구겨진 로또 종이를 민희의 자취방을 향해 던졌다. 너와는 정말 이렇게 끝나는구나. 너를 잡고 싶었어. 너에게 미안한 것도 많고. 너에게 미안한 것이 많아서 네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 잡지 못했어. 솔직히 많이 생각했어. 어떻게 하면 너를 다시 잡을 수 있을까. 기적 외에는 잡을 수 없다는 것, 알고 있었어. 이미 다른 사람과 사귀고 있는 너, 지금 잡지 않으면 너무 늦어버리니까. 하지만 기적 따위는 없어. 없는데 바란 거야. 이제 나도 너를 깨끗이 잊을게. 항상 즐거웠으면 좋겠다. 나 때문에 혼자 속으로 힘들어했던 거 나도 아니까.

 500원을 손에 꼭 쥐고 걷는다. 이제 방에 돌아가야지. 내일 다시 도서관에 가고 이력서를 넣을 곳을 찾아보아야 한다. 무거운 가슴을 안고 또 반복되는 어두운 일상 속에서 길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방에 돌아가서 집에 전화도 해야 한다. 돈을 잃어버렸으니 다시 보내달라고. 보나마나 혼나겠지. 그래도 별 수 없다. 지금은 그 방법 외에 마땅한 방법이 없으니까. 방에 돌아가면 또 집에 전화번호를 누르기 힘들 거다. 그러나 누르는 수밖에 없다.